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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2 오후 4:06:24 입력 뉴스 > 예천인터넷뉴스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제39화] '정월대보름'



대대로 악행 일삼던 노 진사네 집안, 줄초상 겪는데 문상객 하나 없어선산에 조상의 무덤들이 능처럼 여기저기 앉았는데 노 진사는 맨 아래 아직 뗏장도 제대로 덮이지 않은 작은 무덤 앞에 엎드려 머리를 처박고 구곡간장이 끊어지듯 소리 죽여 울음을 쥐어짰다. 밤이 깊어 삼경이라, 그때 횃불이 너울거리며 노 진사네 하인들과 산 아래 산지기가 올라와 노 진사를 둘러업고 산에서 내려갔다.

 

 

작년 가을, 노 진사의 삼대독자 득필이가 일곱살 꽃망울로 저승사자에게 끌려갔다.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잔칫집에 다녀와 토사곽란으로 뒹굴다 약 한 첩 못 써보고 숨을 거두었고, 할아버지는 손자를 홀로 저승에 보낼 수 없다며 목을 매 줄초상이 났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은 온 마당이 가림막으로 뒤덮이고 드넓은 대청에 빈소가 차려졌건만 문상객은 보이지 않고 영문도 모르는 개와 고양이만 기웃거렸다. 이 고을 에서 세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부자요, 글 잘 쓰는 선비인 노 진사가 삼대독자 아들을 잃고 하루 사이에 부친상까지 줄초상을 당했는데 문상객이 오지 않는다? 동구 밖 주막 집엔 장날도 아닌데 때 아닌 손님들로 웅성거렸다.

 

"하늘 그물이 아무리 성글어도 잡을 놈은 다 잡는 법." "나는 진작에 그렇게 될 줄 알았어." "오늘은 술이 왜 이리 잘 넘어가는 겨어어~" 입 달린 사람들은 모두가 한마디씩 악담을 퍼붓더니 나중에는 웃음소리까지 터졌다.

 

노 진사네 집안은 대를 이어가며 수많은 사람에게 뼈 맺힌 원한을 샀다. 장리쌀을 놓고, 몇 마지기 안 되는 빈농의 터전을 빼앗아 온 가족을 다리 밑 거지로 만들었다. 어미 약값에 허덕이던 열여섯 살 처녀를 노 진사가 노리개로 삼자 모녀가 함께 목을 매는 일도 일어났다.

 

노 진사네 머슴들은 울고 나가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러한 악행은 윗대서부터 내려와 고을 원님 귀에까지 들어갔건만 노 진사가 아부와 뇌물로 원님을 삶아놔 억울한 사람들이 발고를 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노 진사 부인은 아들 득필이 묘지에 3일마다 찾아가 따끈한 송편을 한소쿠리씩 놓고 돌아갔다. 죽은 아들이 송편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부인이 떠나자마자 솔숲에 숨어 있던 거지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그때 마침 술에 취한 노 진사가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봤다.

 

이틀 후, 부인이 아니라 노 진사네 하인이 송편 소쿠리를 놓고 갔다. 하인이 산허리를 돌자 숲에서 거지 아이들이 몰려나와 송편을 양손에 들고 볼이 터져라 입속에 밀어 넣다가 "~~" 일제히 울상을 하고 입속의 송편을 뱉어냈다. 송편 속에 소똥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다음 불행은 노 진사에게 덮쳤다. 그날도 대낮부터 술을 마시다 폭 고꾸라졌는데 일어날 수가 없었다. 다리가 마비되어 앉은뱅이가 된 것이다. 백약이 무효, 팔도강산 용하다 소문난 접골사가 모두 와도 허사였다. 노 진사가 허리띠를 풀어 문고리에 목을 매려 했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아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곳간 열쇠를 부인에게 맡기고 노 진사는 노스님 손에 이끌려 가마를 탔다. 날이 저물면 주막에서 자고 날이 새면 또 이동해 열흘이 걸려 이백여리나 떨어진 온천에 다다랐다. 탁발승 노스님은 대를 이어 노 진사댁을 출입했는데 노 진사의 악행을 만류하다 지쳐서 침을 뱉고 발길을 끊었다. 그러나 노 진사 부인을 장터에서 만나 그녀의 간청으로 동행하게 됐다.

 

노스님은 노 진사와 함께 온천에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봄에는 진달래에 파묻혀, 여름엔 녹음 아래 흐르는 계곡에 발을 담그고, 가을엔 낙엽을 맞으며, 겨울에는 온천 손님방 화롯가에서, 노 진사와 노스님은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정월대보름, 드넓은 노 진사네 마당에 동네 윷판이 벌어졌다. 차양이 쳐지고 소 한 마리, 돼지 다섯 마리를 잡고 온 동네 사람이 모여 윷판에 술판에 노래판에 춤판에 귀가 먹먹한데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노 진사가 제 발로 성큼성큼 걸어서 온 것이다. 부인이 달려가 노 진사를 안고 통곡하자 흥겹던 윷판이 눈물바다가 됐다.

 

지난 일 년, 노 진사가 없을 때 부인이 노 진사가 남의 가슴에 박았던 못을 모두 뽑았다. 아들 득필이 무덤 아래 집을 지어 거지 아이들을 살게 했다. 재산이 반으로 줄었다. 노 진사가 부인을 안고 눈물을 흘렸다.

 

"잘했소, 정말 잘했소. 내 다리가 펴진 것은 부인이 덕을 베풀었기 때문이오." 윷판은 다시 이어졌다. 시월상달에 마님이 아들을 낳았다.

 

조주청(45년생) 작가는 안동시에서 출생.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 안동에서 호텔을 운영하다가 1981년 조선일보의 레저잡지 월간 산에 독자만화 투고를 통해 만화가로 데뷔하였습니다. 풍자적이고 익살스런 그림체가 인상적이며 월간조선에 경제만평을 연재.

 

정차모 기자(jcm542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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